아름다움을 넘어 삶을 바라보다
나는 새로운 도시를 갈 때마다, 가능하면 그곳의 미술관을 들르려고 애쓴다. 미술을 좋아하게 된 데는, 어릴 적 막내 이모의 영향이 컸다.
초등학생이던 시절, 우리 집 근처에 살던 막내 이모는 스스로를 예쁘게 가꾸는 걸 즐기는 사람이었다. 나는 자주 이모 집에 놀러 갔고, 그곳에 놓인 예쁜 물건들을 구경하거나, 이모의 책을 읽곤 했다. 특히 눈에 띄었던 것은, 책장 가득 꽂혀 있던 미술 화보집들이었다.
어린 나는 그 책들을 펼쳐 들여다보며, 그림의 역사나 맥락은 알지 못했지만 색채와 형태만으로도 충분히 새로운 세계를 경험할 수 있었다. 그때의 시각적 충격은, 긴 시간 내 안에 작은 불씨처럼 살아남아 있었다.
대학생이 되고 나서는 본격적으로 미술관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친구들과 미술관에서 만나 전시를 보고, 함께 그림을 감상하는 시간이 쌓여갔다. 아름다움을 보는 경험을 거듭하며, 나는 점점 ‘미학’이라는 세계에 깊이 빠져들었다.
그 후로도 여러 나라를 여행하며, 틈만 나면 미술관을 찾아 그림 앞에 오래 서 있곤 했다. 눈은 점점 더 아름다운 것을 찾게 되었고, 마음은 아름다움에 매혹되었다.
지금 살고 있는 버지니아에서도, 나는 자주 워싱턴 D.C.의 국립 미술관을 찾는다. 특히 서관의 중앙 홀에 들어설 때마다, 나도 모르게 마음이 정화되는 느낌을 받았다.
서관의 중심부에 들어서면, 부드러운 물소리가 가장 먼저 귓가를 어루만진다. 웅장한 돔 천장 아래, 검은 대리석 받침 위로 우뚝 솟은 분수대가 자리하고 있다. 맑은 물줄기가 부드럽게 솟구쳐 올랐다가 짧은 반짝임을 남기고 다시 고요한 수면으로 돌아간다. 돔 천장에서 내려오는 자연광은 바닥과 조각상 위에 조심스러운 빛의 무늬를 새긴다.
그곳은 고요하다. 작은 물소리, 속삭이는 발소리, 숨죽인 감탄만이 가볍게 울린다. 분수대를 중심으로 사방으로 뻗어 나가는 복도에는 유럽의 오래된 명화들이 정성껏 걸려 있다. 대리석 벽과 금빛 몰딩은 그림 하나하나를 보석처럼 감싸 안는다.
그곳을 거닐다 보면, 세상사로 조급했던 마음은 한없이 여유로워지고, 내 눈빛 역시 조금 부드러워진다. 뭐랄까, 한템포 쉬어가는 느낌이라고 해야할까. 그래서 미술관을 찾아왔던 것도 맞다.
하지만, 요즘 들어 나는 스스로에게 묻기 시작했다.
아름다움을 보는 이 행위가 과연 늘 좋기만 한 것인가.
아름다움에 익숙해질수록, 눈은 더 매끈하고 조화로운 것만을 찾게 된다. 그리고 무심결에, 그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것들을 뒤로 밀어내는 습관이 몸에 배어버린다. 그것은 결국, 마음으로 보지 않는 것이다. 나는 나 자신에게 경종을 울리기 시작했다. 이건 좋은 징조가 아니다.
무엇이든 꼭 아름다울 필요는 없다. 사람이든, 사물이든, 각각은 저마다의 고유한 얼굴과 결을 지니고 있다.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못한다면, 우리는 삶을 이해하는 데 실패하는 걸지도 모른다. 이를 테면, 나이가 들어가면서 자연스럽게 생기는 주름같은 것들 말이다.
모든 현상, 모든 존재를 ‘아름답다’거나 ‘아름답지 않다’는 잣대 없이 그저 고유한 것으로 인정하고 포용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삶을 더 깊이 받아들이는 연습이 아닐까. 아름다움은, 보는 이의 마음에 따라 달라진다. 결국, 사랑도 삶도 마찬가지 아닐까 싶다.
_단단글방 28기, 김윤미님